들뢰즈의 말을 빌리자면 무대 위의 공간은 “어디나이되 아무곳도 아니며, 누군가는 누군가이되 아무도 아닌” 암흑입니다. 암흑 위에서 백색의 무대와 백색의 옷을 입은 사람들이 세워집니다. 변칙적으로 짜인 음과 리듬에 따라 사람들은 움직임을 만들어내고 그 움직임은 또한 무대를 움직입니다. ⟪첸치가의 사람들⟫은 무대 안의 사람들과 무대 밖의 사람들에 의하여 약동합니다. 여기에 부여된 의미는 없습니다. 객석에서는 일상을 벗어난 신비로운 상황과 이에 맞춰 버둥거리는 거대한 무대만을 마주하게 될 뿐입니다.
로마의 귀족 첸치는 자신의 가족에 대한 강한 혐오감을 드러내며 잔인한 악행을 저지릅니다. 돈, 명예, 사랑, 정의, 등 인물들은 각자의 욕망에 맞추어 첸치에 대항합니다. 인물 모두가 의식 깊은 곳에 숨기어 품고 있는 허무주의적 몸부림은 그들 모두를 무와 멸의 세계로 인도하게 됩니다. 첸치가 선언하는 ‘연극’으로 시작되는 90분의 폭풍은 연대와 파멸 동정과 광기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이 백색의 움직임, 그리고 그 사이를 유령처럼 스치고 지나다니며 마침내 무대 위의 현실을 장악해버리는 ‘악’의 존재는 극장 안의 모두를 백색의 암흑으로 휘몰고 갈 것입니다.